달팽이 약속 | 내고향 진달래

时间:2020-10-04 来源:中国朝鲜语广播CNR

글 | 성송권 · 방송 | 구서림

    이 세상에는 천가지 만가지 꽃들이 있다. 부귀영화를 자랑하는 목단, 눈속에서도 어여쁜 자태를 뽐내며 피여나는 매화, 화사한 봄날의 천사 벚꽃, 애정, 지혜, 우의 상징 장미, 고상한 령혼의 상징 목란, 자손이 한구들이고 기상이 넘치며 광명과 길상을 상징한다는 석류화, 청춘을 붙잡고 놓치않는 월계화, 그외도 살구꽃, 복사꽃, 사과꽃, 오얏꽃... 그 많고많은 꽃중에서도 나는 내 고향의 진달래를 제일 사랑한다.    

  

    고향 사람들은 진달래를 천지꽃이라고도 부른다. 해마다 4월이 오면 내 고향의 산과 들에는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5월이면 절정이라 대홍단을 이룬다. 그중에서도 남산의 진달래가 더 아름답게 보인다. 푸른 소나무가 듬성듬성한 솔밭에 떨기떨기 피여난 진붉은 진달래는 한폭의 아름다운 유화같다. 제아무리 유명한 화가일지라도 내 고향 남산기슭의 소나무와 진달래가 어울린 절경을 화폭에 그려 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고향 진달래와 벗하며 자랐다. 어린 시절 진달래꽃 피는 계절이 오면 늘 어른들이 밭갈이 하는 남산기슭에 따라가 진달래 꽃밭속에서 장난치며 놀았는데 어른들이 쉼할때면 우리 조무래기들을 보고는 진달래꽃 꽃살을 세여보란다. 우리가 신나게 꽃살을 세여 바치면 어른들은 올해도 풍년이요, 흉년이요 하면서 한해 농사를 건너 짚었다. 꽃살이 많으면 낟알도 많이 열어 대풍이란다. 그래서 나는 크고 예쁜 송이를 따서 꽃살을 세여들여 어른들을 기쁘게 해드렸다. 그러면 어른들도 올해도 어김없는 대풍년이라 하시며 피우던 담배를 뿌려치고 발갈이를 다그쳤다. 종일 장난치고 집에 돌아 올때면 꼭 진달래를 한줌씩 꺾어와 물병에  꽂아넣고 해빛이 잘드는 창문가에 놓는다. 며칠후 오동통한 꽃망울이 생기는데 다치면 바로 터질 것 같은 불그레한 꽃봉오리가 방실 웃으며 피여난다. 아마도 내가 세상 물정을 알게 된후의 제일 아름답고 제일 사랑하는 꽃이였던 것 같다. 

  

    내가 진정 진달래꽃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지어는 경의를 금치 못하게 된데는 어머니손에 끌려 소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해마다 청명이면 우리는 선생님을 따라 남산 기슭에 높이 세워져 있는 혁명렬사기념비를 찿았다. 푸른 청송과 진달래 꽃밭속에 둘러 있는 렬사비 앞에서 나는 처음 내고향 렬사들의 사적을 들었다. 일제 강점시기 많은 항일투사들이 빼앗긴 나라를 찾고저 항일 유격대에서 일제와 싸웠는데 어느 하루 변절자의 밀고로 10여명 항일 유격대 투사들이 체포되였다. 적들은 서슬푸른 날창으로 그들의 가슴을 마구 찌르고 농막에 가두어 넣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는 천추에 용서 못할 사건을 저질렀다.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내 고향의 나젊은 청년들이 동북인민해방군에 지원해 나서 료심전역에서 해남도 해방까지 그길로 항미원조 전쟁까지 치르면서 피를 흘렸다. 오지 마을 내 고향에서도 30여명의 렬사가 나왔다. 70년대초 내가 영호 소학교를 다닐 때 어느 하루 오전 상학을 마치고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오니 뒤집 친구집에 온 동네 어른들이 모여 추도회를 하고 있었다. 17세 어린 나이에 참군하여 해방전쟁을 마치고 그 길로 항미원조 전쟁에 나갔던 친구의 맏형의 렬사증이 내려왔던 것이다. 같이 참군했던 물남촌의 전우도 돌아온지 몇해 되는데 계속 소식이 없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친구 부모님들이 끝내 락동강의 어느 전투에서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받았다. 1977년, 내가 고중을 졸업하고 귀향하여 농촌에서 공청단 총지서기로 사업할 때다. 해마다 5.4청년절이면 한패의 우수한 청년들을 공청단에 가입시키고 렬사비에 가서 선서의식 활동을 조직했는데 그해에 친구 종덕이도 있었다. 그는 고아였다. 아버지가 해방군에 입대하여 해방전쟁이 끝나자 그길로 항미원조 전쟁에 나갔는데 3년 전쟁이 끝난후에도 생사 불명이였다. 이제나 저제나 하고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친구의 어머니는 남편을 찾는다고 어린 그를 떼여놓고 조선에 갔는데 역시 무소식이였다. 그리하여 어린 나이에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저녁이면 엄마가 그리워 말라버린 할머니 젖가슴에 안겨 잠들군 했다. 그해 우리 학교에 사범학교를 금방 졸업한 쌍태머리 예쁜 처녀선생님이 오셨다. 선생님은 종덕이 집에 하숙을 잡았는데 그를 살뜰히 보살펴 주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로 한쪽다리를 저는 그를 늘 업고 다니기도 했다. 더우기 비오는 날에나 눈오는 날, 그리고 해마다 봄, 가을에 원족 가는 날에는 그 먼길도 고생스레 업고 다녔다. 그날 활동이 끝나고 그는 나를 찾아 입단지원서에 부모 간략을 쓰다가 보지도 못한 아버지의 유복자로 태여나 너무도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할머니까지 잃고 고아가 된 슬픔에 많이 울었다고 했다. 아마도 같이 있던 선생님이 전근되여 가던 날에 크게 울어보고 이번이 두번째로 크게 운 것 같다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의 행복은 수천수만의 선렬들이 피로 바꾸어온 것이고 그 피어린 발자국마다 진붉은 진달래가 피여난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 고향 남산에는 해마다 진달래가 붉게 피고 푸른 소나무 숲에서는 밤마다 렬사의 혼을 불러 소쩍새가 슬피운다.

 

    나는 내 고향 진달래를 사랑한다. 고향 사람들은 진달래를 참꽃이라고도 부른다. 진달래는 여러가지 약용으로도 쓰인다. 어린 시절 장난이 심해 늘 배고픈 고생을 했는데 우리 조무래기들은 늘 남산기슭에 모여가 진달래 꽃잎도 뜯어 먹었다. 어른들은 또 꽃잎을 따서 꿀에 재워 오지단지에 넣고 문턱밑에 석달가량 파묻었다 먹으면 관절병이 낫는다고 했다. 고향사람들은 진달래 술을 담그기도 해 귀한 손님이 오면 내놓기도 했다. 내가 소학교 졸업 무렵 아버지가 천식을 앓으셨는데 겨울이면 더 심해 장밤 기침을 하셨다. 진달래 꽃잎을 꿀에 재워드시면 좋다고 하여 꽃잎 따던 일도 있었다.

  

    내 고향의 진달래는 올해도 붉게 붉게 피였다. 고향 렬사들의 진붉은 선혈에 물든 듯 고향 사람들의 행복한 생활을 축복하면서 떨기떨기 피여난다.



监制:金光永

审稿:赵香兰

编辑:具瑞琳

制作:朴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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