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된 바람

时间:2020-06-21 来源:中国朝鲜语广播CNR
      “자녀를 사랑한다면 도의를 가르쳐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습근평은 혁명가정에서 성장했다. 부친 습중훈은 자상한 아버지인 동시에 스스로 자녀에게 모범을 보이기에 노력하며 자녀교육에서 한결같이 엄격함을 요구했다. 이는 습근평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습근평은 부친의 생일을 맞아 드린 문안편지에서 “아버지로부터 본받고 싶은 소중하고 고상한 품성이 많습니다”라는 말로 부친에 대한 깊은 정을 표달했다.

     1978년 8월, 습중훈(왼쪽 세번째)은 광동 혜양의 한 농촌마을을 시찰했다. 당시 청화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던 습근평(왼쪽 첫번째)은 여름방학시간을 타 사회 실천을 하고자 아버지와 동행했다. (사진 래원: “습증훈 화전”)

      습근평은 “소와 같이 인민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부친을 내심 크게 숭배하고 존경해왔다. 그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나로 하여금 인민군중을 위해 봉사하는 일에 필생의 정력을 다하고 이로써 나라와 고향사람들의 키워준 정에 보답하도록 나를 이끌어주었다”고 말했다.

     시공간을 뛰여넘어 정지된 력사의 순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습근평은 부친과 비슷한 일면이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은 마음으로 많은 감동적인 사연을 엮어냈다. 그 사연의 바탕에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깔려있고, 그 속에는 또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이어진 소중한 책임감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다.  
 
 힘을 모아 보호한 림측서 유적

     복건성 복주시는 림측서의 고향이다. 이곳에는 림측서 옛집, 출생지, 기념관을 포함해 진귀한 유적들이 많다.

     력사적 원인으로 20세기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이런 유적들은 오래동안 보수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파손이 엄중했으며 점거까지 당해 문제가 심각했다.

     1990년 5월, “인민일보”는 림측서 유적지 보호에 존재하는 문제점을 제기했다. 당시 전국인대상무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있던 습중훈은 이와 관련해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1991년 7월 복주시 당위원회 서기였던 습근평은 관련 회보 자료에 림측서 옛집 보수작업을 다그치고 묘지 개방을 알심들여 잘해야 한다는 회시를 했다. 그 이후로 습근평은 또 론의를 거쳐 림측서 출생지 회수를 결정하는 등 림측서 유적지 복구 관련 사안을 수차례 검토하였다.

     1995년 6월 3일, 림측서 동상이 복주 남대문-백호정에 세워졌다. 제막식에서 습근평은 “오늘, 고향 인민들이 림측서 동상을 일떠 세운 것은 스스로를 격려하기 위한 것이고 림측서에게서 보여진 중화민족의 위대한 정신이 영원히 색바라지 않도록 후세들을 일깨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문화재 보호는 력사를 잡아두기 위한 것이고 공통된 민족의 기억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습중훈이 세차례나 서안 옛 성벽 보호에 나선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습중훈은 “도시의 력사가 그 맥을 이어가려면  력사적 부호들을 남겨두어야 합니다. 내실이 없다면 빈껍데기나 마찬가지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자신의 생명을 아끼듯이 도시의 력사문화유산을 아껴야 합니다”. 고성 정정에서 용성 복주에 이르기까지 다시 수도 북경에 이르기까지… 한갈래 골목길 보호에서 전반 도시 보호에 눈길을 돌리며, 더 나아가 전반 나라의 청사진을 손수 그리며 습근평은 부친과 똑같이 문화의 계승과 발전에 큰 중시를 돌리고 솔선하여 건설과 보호의 조화로운 통일을 추진했다.

용수 두그루로 이어진 부자간의 정신력

     심수영빈관의 “란원”별장에는 아름드리 용수 한그루가 록음이 우거진 채 우뚝 서있다. 이 나무는 2000년 습중훈이 직접 심은 나무이다. 습중훈은 광동 개혁개방의 주요 개척자이자 중요한 정초자이기도 하다. 그 나무는 습중훈이 광동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분투해온 력사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말 한마리가 앞장 서 내달리던”데로부터 “천군만마가 함께 질주하는” 장관을 연출하고 “꽃 한송이가 외롭게 피여 있던”데로부터 “백화가 만발하는” 화려한 모습이 펼쳐지기까지 광동 개혁개방의 개척자들은 뚝심 하나로 선인들이 해보지 못한 일에 과감하게 도전하며 굳센 의지력으로 난관을 뚫고 발전의 새 장을 열어놓았다.
 

     2012년 12월 7일부터 11일까지, 습근평은 광동성을 시찰했다. 이는 습근평이 심수 화련산공원에서 고산용수를 심는 장면이다.

     그 뒤로 십수년이 지나 습근평 총서기 역시 광동성을 시찰하면서 심수 화련산공원에 직경이 15센치메터에 달하는 고산용수를 심었다. 그곳에서 습근평 총서기는 새 개혁동원령을 내렸다. 총서기는 “광동을 찾은 리유는 우리나라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가장 먼저 불었던 그 현장에서 우리나라 개혁개방의 력사진척을 되짚어보고 개혁개방을 계속 힘있게 추진해나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습근평 총서기는 과거에 쓴 글에서 “완강한 생명력을 갖고 어떠한 척박한 땅이라도, 심지어 깎아지른 절벽이라도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려 무성하게 잎을 피우는 것이 용수”라며 용수의 정신력을 총화한 바 있다.

     뜨거운 열기의 땅, 두 그루의 용수는 개혁개방의 력사진척을 고스란히 지켜봤고 개혁개방을 계속 발전시키려는 불변의 초심을 명시하기도 한다. 그 초심은 시공을 뛰여넘어 영원히 그 맥을 이어갈 것이다. 

힘을 모아 보호한 강

     무더운 여름날의 강남은 높은 하늘에 구름이 엷게 피여 있고 신록이 우거져있다. 황하 기슭에서 걸음을 멈춘 습근평 총서기는 눈길이 닿는 데까지 멀리 응시했다. 황하는 그의 마음속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습근평 총서기는 여태껏 황하 보호와 관리로 로심초사해왔다. 한차례 또 한차례 로고를 거듭하며 그는 황하 류역의 9개 성과 자치구를 시찰하였다. 황하 연안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황하를 인민들에게 복지를 마련해주는 행복의 강으로 거듭나게 해야 합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습근평 총서기가 했던 말이다. 

     강물은 사품치며 흐르고 댐은 아츨하게 높기만 하다. 이름난 삼문협댐은 “만리 황하의 제1댐”으로 불리운다. 지난세기 50년대, 댐건설과정에 습중훈은 수차례 현장 시찰에 나섰다. 삼문협 건설기간, 습중훈은 실효성을 따져가며 착실히 일하고 참답게 조사연구를 진행해 삼문협 수리중추공사 건설과 관련된 과학적이고 대상성이 강한 건의를 제기했다. 


     “과학은 성실해야 합니다. 정확히 알지 못하고 근거가 없으며 시험을 거치지 않고 확실하게 깨우치지 못했다면 아무말이나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세대가 평생 다 해내지 못하면 자손들에게 남겨 해결하게 하면 됩니다.” 습중훈이 남긴 말이다.

     “황하 관리에 있어 중요한 것은 보호이고 시급한 것은 관리입니다.” 부친의 손에서 계주봉을 이어받은 습근평 총서기는 “황하류역의 높은 질적 발전을 추진하고 새 시대의 황하대합창을 새로 창조하기”에 진력해왔다. 2019년 8월부터 2020년 6월까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에 그는 4차례나 황하를 시찰하며 황하류역의 생태보호와 높은 질적 발전에 총력을 다하고 새 시대의 황하대합창 창작을 위해 열심히 조율했다.

     오늘날, 황하류역의 생태보호와 높은 질적 발전은 국가전략으로 승격되였다. “력사적 인내와 전략적 의지를 유지하고 꼭 우리 세대에 성과를 이루지 못해도 된다는 정신적 경지와 성과를 이룩하는데는 반드시 내가 있어야 한다는 력사적 감당력으로 장원한 계획을 세워야 할 뿐만아니라 현재 주어진 과업에 충실하며 하나의 청사진을 끝까지 그려나가야 합니다. 한세대 또 한세대 이어가면서 일을 추진해 황하가 인민들에게 복지를 마련해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늘 인민과 함께, 부자간 “의기투합의 순간들”

     “네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든 부지런히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진심을 다해 인민을 생각하며 군중들과 함께 하고 군중들 곁에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습중훈이 습근평에게 했던 말이다.

     “서북인민의 훌륭한 충복이 될 것이다.” 이는 습중훈이 했던 다짐이다. “나는 인민의 충복이고 인민을 위해 봉사할 것이다.” 이는 습근평이 줄곧 견지해온 집권리념이다.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질척이는 진흙땅을 밟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친절한 아저씨”가 바로 습중훈이였다. 습중훈은 마음속에 늘 군중을 담고 언제나 군중들에게 실리를 가져다줄 수 있는 일을 찾아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에서 민심을 살피고 대안을 찾으며 문제를 발견하면 즉각 지적하고 해결을 요구했다.


     습근평도 바지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비를 맞으며 항구 시찰에 나선 적이 있다. 적삼이 비에 흥건히 젖어 들어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민중들 사이를 오가며 소박한 행차를 이어갔고 가는 곳마다에서 군중들의 질고를 묻고 실무적인 자세로 일을 처리했다. “인민을 마음속 가장 높은 자리에 모셔야 한다”. 습근평 총서기가 지금껏 견지해온 사상이다. 한차례한차례 이어진 기층 조사연구에서 습근평 총서기는 형편이 어려운 군중들을 방문하고 그들의 수요를 물으며 쉼없이 일해왔다.

     “생활형편이 어려워 고생하는 고향인민의 손을 잡고” 습중훈은 감개무량해하며 “로후지역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로후지역의 빈곤하고 락후한 면모를 일신하지 못한다면 군중들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말했다.


      “생활형편이 어려워 고생하는 고향인민의 손을 잡고” 습근평은 그들과 일상사를 터놓으며 가장 소박한 언어로 가장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초요사회 전면 건설 완성에서 한사람이라도 락오자가 있어서는 안됩니다”, 습근평이 늘 하는 말이다. 광활한 중화대지에서 빈곤해탈 공략은 억만 인민들에게 아름답고 행복한 생활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찬란한 길을 열어놓았다. 

     낫 한자루에서 진심이 보인다. 습중훈은 관중 농민의 선량하고 근면하며 근검하고 정직하며 곧은 성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는 농사일의 신고를 잘 알고 있으며 그 땅에서 신근한 땀방울을 흘리고 있는 인민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지니고 있다.


     호미 한자루에서 초심이 엿보인다. 섬북 고원의 진흙탕에 댐을 건설하고 복건 녕덕에서 퇴적물 제거 수로 준설 작업을 완성하기까지 습근평 총서기는 군중들과 숙식을 함께 하고 함께 일하며 인민에 대한 두터운 정감과 이 땅에 대한 깊은 사랑을 자신의 인생 목표에 아로새겼다.

     습중훈은 언제 어디서나 인민을 마음속에 두고 평생 군중로선을 실천해왔다. 습근평은 인민을 마음속 가장 높은 자리에 두고 아름다운 생활에 대한 인민군중의 념원을 분투 목표로 삼았다. 

     똑같은 목표, 비슷한 행동궤적, 우연한 일치처럼 보이는 배후, 이 모든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의지를 같이 한 인민을 향한 끝없는 사랑이다.  


监制:金光永

审稿:金光永

翻译:赵香兰

制作:崔月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