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의 작은 효심으로 어찌 어머니의 깊고깊은 은혜에 보답할 수 있을가

时间:2020-05-10 来源:中国朝鲜语广播CNR
    누가 자식의 작은 효심으로 봄날의 따사로운 해볕 같은 넓고 깊은 어머니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고 했는가?!


    습근평 총서기의 집무실에는 부모님, 가족들과 찍은 사진 몇장이 놓여져 있다. 그 중 한장이 바로 모친의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사진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준다.

    부모는 천하에서 가장 선량하고 자식은 천하에서 가장 효심이 크다고 한다.

    “가정은 인생의 첫 학교이고 부모는 자식 인생의 첫 스승이다.” 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여준 모친의 참다운 가르침은 습근평의 평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글자를 몸에 새기다니 얼마나 아플가요!”

    “아프긴 하겠지만 평생 잊혀지지 않고 가슴 속 깊이 남겨지겠지.”

    습근평 총서기는 아직까지도 5,6세 때 “충성을 다하여 국가에 보답해야 한다”는 모친의 가르침을 깊이 새겨두고 있다. 그해 모친은 그를 등에 업고 신화서점에 가 악비의 이야기를 다룬 책을 사주었다. 집에 돌아온 모친은 어린 습근평에게 “진충보국”, “악비의 모친이 악비의 등에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로부터 “진충보국”은 작은 씨앗 같이 습근평의 가슴 속 깊은 곳에 남겨져 평생의 등대로 작용했다. 

    주지하다 싶이 습근평의 부친은 로혁명가이다. 그러나 그의 모친 제심도 항전시기의 혁명가였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습근평의 모친 제심은 13세에 혁명에 참가했고 17세에 입당했다. 그 뒤로 수십년간 그는 남북을 옮겨다니며 한마음 한뜻으로 당에 충성하며 굳은 의지로 혁명에 헌신했다. 중국인민항일군사정치대학에서 어렵게 공부하면서 그는 혁명 락관주의 지조를 키우고 혁명 투쟁의 의지를 굳혔으며 공산주의 인생관을 갖게 되였다.

    “부모로서 가장으로서 아이에게 어릴 때부터 아름다운 도덕관을 물려주고 아이가 강직한 기개를 갖도록 도와주며 고운 심성을 키워주어 건강하게 성장하고 어른이 되여서는 나라와 인민에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가정 환경이 습근평의 큰 나라 사랑을 키워줬고 높은 지조와 강직한 기개를 함양하게 했다. 


    습씨 가문은 엄하게 자식을 키우고 근검절약하는 가풍이 있다.

    모친 제심은 줄곧 자신의 행동으로 우수한 가풍을 이어가며 자녀들을 가르쳐왔다. 가풍의 영향을 깊이 받은 습근평도 근검절약하고 소박한 기풍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1959년, 제심과 가족들

    살림을 할라니 자녀를 키울라니 거기에 사업까지 할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지만 습근평의 모친 제심은 늘 일을 첫자리에 놓고 업무에 지장없이 모든 일을 처사했으며 어려움이 있더라도 스스로 극복해나갔다.

    그는 여직껏 소박한 생활습관을 이어왔고 습중훈의 부인이라고 특수화를 부린 적이 없다. 자녀들은 전부 기숙제 학교나 전탁에 보냈고 그 사이 가사도우미 한번도 두지 않았다. 남편의 관계를 리용해 근무지를 집 근처로 옮길 생각을 한 적도 없고 부총리 부인이라는 신분으로 단 한차례 외사행사에 참가한 적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시기라 하더라도 그는 달마다 꼬박꼬박 당비를 납부했다. 

    “너희 어머니는 우수한 공산당원이란다!” 이는 습중훈이 안해에 대한 높은 평가이고 진심어린 찬상이다. 

    바르고 청렴하며 화목한 가풍은 습근평으로 하여금 “인생의 첫 단추를 잘 채울수 있도록 했고”, 가치관의 옳바른 바탕색을 갖게 했다.  


    습근평은 가정을 중시하고 혈육의 정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지도간부로 있다보니 명절이라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2001년 음력설, 모친 제심은 당시 복건성 성장으로 있던 습근평과 통화를 가졌다. 전화에서 그는 습근평에게 “사업을 잘하는 것이 우리에 대한 가장 큰 효도이고 가정에 책임지고 스스로에게 책임지는 것이며 이 모든 것은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작은 집”과 “큰 집”은 결국 같은 뿌리를 갖고 있다. 모친의 리해와 지지속에는 아들이 “감당력”을 갖고 “소임”을 다하길 바라는 큰 기대가 담겨져 있다.

    인민을 위해 일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습근평은 수천수만 가족들의 아름다운 생활을 평생의 분투목표로 삼았다.

    “나의 집권 리념은 한마디로 인민을 위해 봉사하고 마땅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습근평 총서기는 일편단심 인민을 위하는 마음으로 기층에 심입해 “부모님을 대하듯이 군중들을 아끼는” 초심으로 일했다.


    청렴은 보이지 않는 힘이자 가족에 대한 가장 좋은 선물이다. 그동안 습근평의 행보에는 모친 제심의 격려와 가르침이 동반되였다.

    한번은 자녀들 앞에서 제심은 “집안의 사소한 일로 업무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부친 습중훈도 “큰 일이 있어도 절대 사업에 영향 줘서는 안된다”고 엄하게 가르쳤다. 

    습근평이 복건성 성장으로 있을 때 모친 제심은 아들에게 편지를 보내 “높은 곳 일수록 추위를 견디기 힘들테니 더욱 엄하게 자신을 요구해야 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사람이 청렴자률하지 못하면 기개가 없습니다. 청렴은 복이고 탐욕은 화라는 도리를 항상 명기해야 합니다. 옳바른 권력관과 지위관, 리익관을 수립해야 하며 언제나 마음을 다잡고 행동을 단속하며 결백을 지켜야 합니다.” 나라를 위해 당을 건설하고 청렴결백하게 공무를 집행하는 본색은 습근평의 국정운영의 리념과 실천 속에 깊이 새겨져 있다. 
  

    제심은 “일도 잘하고 공부도 잘하며 모든 일을 잘 처리하라”는 남편의 당부를 인생 좌우명으로 삼았다.  

    * 1975년, 습중훈과 제심이 자녀들과 락양 홍기사진관에서 찍은 가족사진. 뒷줄 좌로부터 아들 습근평, 딸 습안안, 사위 오룡

    그 어려웠던 나날에도 제심과 자녀들은 기죽지 않았다. 제심은 강인하고 자애로운 모성애로 가족을 보듬었다. 모친의 사랑속에서 온 가족은 확고한 신앙과 락관적인 태도로 운명의 우여곡절과 인생의 시련을 함께 이겨냈다. 

     “큰 일, 어려운 일에서 감당력을 보아낼 수 있고 역경과 순조로운 환경속에서 도량을 보아낼수 있다” “순조로운 환경속에서는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하고 역경속에서는 침착해야 한다.” 평생 분투해온 부모님의 인생 경력은 습근평에게 심원한 영향을 주었다. 

    다년간 사업과 직무에 어떤 변화가 있든지 습근평은 시종 모친의 당부를 명기하고 초심을 굳건히 지켰다. 


监制:金光永

审稿:赵香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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编发:金龙